안개마을 / Village of Haze

1983 / Kwon-Taek IM / IMDb / KMDb
★ 3.6

영화에 등장하는 오래된 충북 버스를 보며 얼마전 캠핑을 다녀온 충주호를 생각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충주호롤 인해 수몰된 곳에서 촬영을 했다 한다. 컨텐츠뿐만 아닌 기록물로서의 영화의 역할을 되새겼다.

송길한 작가와 임권택 감독식 사회실험. 원작 소설이 있는줄 몰랐기에 완전한 창조라 생각하며 봤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원작이 있어도 그 실험을 다듬어 더 정제되고 설득력 있는 작품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놀라운 포인트였다. 물론 이 놀라움에는 정성일 평론가의 분석이 한 몫 했다. 샷과 카메라를 하나하나 도막내어 분석하다니, 논문도 이렇게는 못쓰겠다. 이 변태성이 관객인 내게 있어서는 영화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화룡점정같은 사건이었다.

초록 코트에 빨간 우산을 쓰고 눈이 내리는 역사를 배회하는 장면에서 짧은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폐역이 되어버린 원주 신림역을 찾아보기도 했다. 마음을 녹이는 미장센이란. 미장센이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컨텐츠와의 완전한 부합이 이뤄졌을 때 빛을 발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울적할 땐 화투가 제일이라며 호주머니에서 화투패를 꺼내고 판을 까는 이장님 부부의 쿵짝이 왜이리 웃기던지. 그런 너스레가 시공간을 가르는 행복함이란 생각도 했다.

클라이막스가 지나갈 쯤 깨철이의 표정 없이 그의 발걸음만 담는 카메라가 놀라웠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장면에 있어서만큼은 임권택 감독이 송길한 작가를 초월한 대단한 해석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 동료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단순히 닫힌 사회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이 세계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사건으로 확장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그 얼굴을 달리할 뿐 날 것의 내면이 까발려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를 뜨끔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촬영에 단 12일이 소요되었다 한다. 시골마을에서의 복작복작한 촬영 현장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처음 제대로 본 정윤희 배우의 작품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4K로 복원한 판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 짱짱한 화질에 눈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