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 Gurye

원래는 산청에서 지리산 1박 2일 등산 후 구례로 돌아와 하루를 쉬다 대전으로 올라오려 했다. 원래 비소식이 있던터라 판쵸부터 이런저런 만반의 준비를 끝냈는데, 여행 전날 저녁 강한 비로 인해 탐방로와 대피소의 전면 통제 문자를 전달 받았다. 여행을 취소하느냐 다른 지역으로 돌리느냐 늦은 밤까지 짜와 토론 끝에 결국 원래 가려했던 구례에 하루 더 일찍 도착해 천천히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그 전에 짜와 쏠이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러 함께 여행했었고 그 기억이 무척 좋았다는 얘기를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 이후에 구례를 홀로 가본적이 있는데 그 느낌을 따라갈 수 없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짜와 함께 한다면 반절이나마 행복할 것 같아 주저없이 구례행을 택했다.

원주민과 구례에 정착한 외지인들이 이런저런 좋은 공간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왔다. 그런 로컬프로젝트가 진행되는 한국의 지방 소도시들이 곳곳이지만, 이번에 방문한 구례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탄탄하게 포근한 느낌이었다. 멋드러진 지리산 자락에 펼쳐진 너른 분지, 그리고 그 평야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바닷가가 아니라도 한번쯤 살아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도시였다.

이른 아침 일어나 구례로 떠났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조용필의 Hello 콘서트 라이브 앨범을 틀며 길을 떠났는데 구례에 도착하니 딱 마지막 곡이 흘러나왔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주말에는 웨이팅이 어마무시하다는 목월빵집이 첫 타겟이었다.



오픈런이기도 했고, 비가 많이 내려 사람이 거의 없었다.



듣던대로 재밌는 이름의 우리밀빵이 많았다.



무엇을 살지 고민하다 추천을 받아 가장 클래식한 것 하나와 소세지빵을 샀다.



우유를 한 잔 시켜 커팅한 빵과 아침을 해결했다. 충대 도서관에서 빌려온 <송길한 시나리오 선집>에 실린 “비구니” 시나리오를 읽었다.



빵집의 곳곳이 아늑했다. 화장실의 수도 안내에 피식했다.



비가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바게트 조명 아래서 고요히.



시나리오를 모두 읽고 가방을 챙겨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구름에 가려 지리산 봉우리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짜에게 미리 추천받았던 오차커피공방으로.



굉장히 낮은 좌식 테이블이 있는 카페였다. 사장님께서 안에서 분주하신데 오가는 사람의 기척을 놓치시는지, 카페에 들어와 한참을 서있다 그냥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카페 곳곳에 구례의 지역 활동에 대한 여러 포스터와 책 , 그리고 서명판이 놓여있었다. 테이블에서 발견한 아삭! 지리산. 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했는데, 여행을 끝내고 뒤돌아보니 이 책이 이번 여행의 예고같은 책이었다. 우리가 다녔던 곳들,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가득했던.



예쁜 찻잔 가득 내려주신 커피로 비에 차가워진 몸을 녹였다. 커피를 가득 담아주신 덕에 사장님께서 테이블로 가져다주시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을 아이스브레이킹으로 채우느라 바빴다.



경기도에서 내려오는 짜가 구례에 거의 다왔다는 얘기를 듣고 카페에서 일어났다. 하나로마트에 들려 숙소에서 마실 막걸리를 구매했다. 짜가 예전에 마셔봤다는 남원의 정담, 둘레길 막걸리, 순천의 나누우리 막걸리를 구매.



짜와 만나기로한 화엄사 자락으로 향하는길. 여름을 목전에 둔 숲의 색이 아름다웠다.



첫 번째 밥집 앞서 만난 동네 강아지들.



쑥부쟁이 솥밥과 바지락 순두부에 쑥솥밥을 추가해 주문.



반찬은 그저그랬는데, 솥밥이 맛있었다.



그리고선 화엄사에 올랐다. 아직도 내리는 비에 계곡물이 많이 불어있었다.



힙스터 부처님.



화엄사는 이전에 입구까지만 와보고 경내에 들어와보지 않았었는데, 절경이었다.





연기암까지 올라보기로 했다. 다리를 건너 숲으로 진입한다.



숲길에 들어서니 비로소 국립공원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



40분정도 걸려 연기암에 도착했다. 도착하고보니 여기까지는 사실 차로도 올 수 있다고. 그래서 숲길에 사람이 없었나보다.




저 멀리 보이는 섬진강 자락이 아름다웠다.



거대한 마니차를 돌리며 나는 종소리와 빗소리가 어우러져 바라보는 지리산이 경이로웠다.



내려가는 길에 만난 다람쥐.



화엄사 구경을 마치고 화엄사 카페에서 산수유차로 목을 축였다.



숙소로 내려가는 길에 동네 슈퍼에 들러 치킨을 포장했다.



그리고 치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짜의 의견을 존중해 다슬기 전문점에서 토장탕과 다슬기회도 포장.



이번에 숙소는 오미마을에 있는 운조루막둥이네로. 여러 채가 붙어있는데도 조용하고 아늑했다. 개인 정비를 하고 사온 저녁을 뚝딱 먹으며 하루를 마감했다. 한화의 10연승 경기를 잠시 틀어놓고 함께 봤다.



다음 날 아침. 전날 짜와 얘기하다 노고단에 올라가 보자는 의견을 나눴다. 아침에 눈을 떴을때 몸살기가 살짝 있는 것이 컨디션이 영 좋진 않았는데, 그래도 올라가 보기로. 성삼재로 향하는 길에 운무가 자욱했다.




새고 싶은 샛길이 너무 많아보였다.






다음엔 저 노고단 고개를 넘어 천왕봉까지 종주를 해볼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노고단으로. 처음엔 가늘게 내리던 비바람이 거세져 우산도 쓸 수 없었다.



정상석에서 짜요와. 곰탕뷰라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자락은 마음으로만 보고 왔다.



하산하는 길. 강아지와 올라올 수 있는줄 몰랐다.





안전하게 하산해 가보고 싶었던 카페 무우루로 향했다. 식사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인데, 무우루에 오픈런하지 않으면 한참을 웨이팅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은 카페부터 가서 숨을 돌리기로.



아주 옛날부터 찜콩해둔 곳이었는데, 이래저래 무척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짜의 말에 따르면 이런 한식 재료를 가지고 디저트를 만든 시초같은 곳이었다고. 지금은 너무 흔해져버린 디저트지만.



특히나 음악이 별로였다. 짜요도 힘들었는지 짜요의 플레이리스트에 각자의 에어팟을 연결해 나눠 들으며 책을 읽었다.



배꼽시계가 울릴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읍내로 향했다. 시장에서 발견한 벽에 쓰인 원산지 표시판. 덮어쓰기가 가능한지 궁금해졌다.



오늘의 점심은 가마솥소머리국밥. 우리와 다른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선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시라는 것부터 믿음이 가는 구례 맛집이었다.



특히나 김치가 너무 듣도보도 못한 맛이라 놀랐다. 게장맛이 날 정도로 강한 젓갈 향의 김치였는데, 나중에 계산할 때 사장님께 여쭤보니 4가지 종류의 젓갈을 쓰셨다고. 나중에 김장할 때 놀러오라 너스레를 떨어 놓으셨다.



밥을 먹고 카페 로파이에서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저녁 행사로 낮시간은 임시휴무. 길거리에서 호다닥 다음 장소를 찾아보다 발견한 봉서리로 향했다.



동네에 길강아지들이 많았는데, 다들 겁이 많아 막상 제대로 다가오지는 못하고 꼬리를 흔들며 짖기만 하던 녀석들.



봉서리책방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레몬 머틀이라는 잎차를 마시며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장님께서 너무 사근하셔서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이었다. 가져간 책도 거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귀촌한 사람들인지 원주민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포근한 동네였다.



책방 건너편에 위치한 느긋한 쌀빵 집에도 들렀다.



로컬 식재료나 제로웨이스트 제품들도 함께 판매하고 있었는데, 나는 갑자기 시작된 급격한 컨디션 난조로 대충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반달곰을 사랑하는 업체들이 모여 만든 사회적 활동도 흥미로웠다. 리스트를 보니 우리가 벌써 세 군데나 방문했더라.



봉서리를 마저 산책했다. 이 동네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이 곳에 머무는 사람들이라면 함께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다시 차를 타고 서시천으로 이동. 섬진강변을 걸었다.



그리고 저녁으로 찜콩해둔 동아식당으로. 반찬은 무척 맛있었는데,



가오리찜이나 돼지족탕이 컨디션 난조에 기름을 부어 완전히 끝나버렸다. 짜요가 거의 다 해치워줘 다행히 끝낼 수 있었다. 연로하신 사장님들께선 너무 친절하셨는데, 계산하고 나가는 우리들 손에 직접 농사지으셨다는 포실한 찐감자도 두 알 쥐어주셨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서 판콜을 사먹고 뜨신물로 씻으니 다시 또 컨디션이 돌아왔다. 어제 남은 안주에 막걸리를.



짜가 오늘 책방에서 사온 책. 아까 서점에서 같이 볼때도 배꼽을 잡았는데, 숙소에 돌아와서 봐도 피식 웃음이 났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을 준비했다. 짜가 아침에 오렌지를 깎고, 커피를 갈아 내려줬다. 내가 목월빵집에서 사왔던 빵을 데워 간단한 아침으로 나눠먹었다.



오미마을을 산책했다. 첫 날 밤에도 부른 배를 꺼트리려 짜와 함께 산책했었는데, 낮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운조루를 구경했다. 입구에 앉아계신 연로하신 종부님께 천원을 건네고 입장.



대청마루를 바깥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구경했다.



이제 슥 돌고 나가려는데, 지긋하신 신사 두 분께서 대청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며 들어와 구경하라 하셨다. 들어가 구경을 하다보니 마루로 나와 차나 한 잔 하고 가라고도 하셔서 또 방석을 들고 차를 얻어 마셨다. 이 차담이 한 시간 반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굉장히 뜻깊은 시간이었다. 차를 끓여주시는 분께서는 여기 운조루의 막내아들이신데 알고보니 우리가 묵은 숙소 사장님이셨고, 같이 차를 마시는 친구분께서는 구례 곳곳의 소식과 사정에 밝은 분이셔서 우리가 궁금했던 식당이나 카페, 장소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술술 알려주셨다. 봉서리나 무우루에 얽힌 히스토리를 듣게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특히나 두 분 다 굉장히 이제 진보적이시고 철학적이신 분들이셨는데, 말씀해주시는 내용들이 짜와 2박 3일동안 붙어 있으며 나눴던 토픽들을 모두 한 번씩은 건드리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해가 뜨고 날이 갰는데도 대청에 그림자가 져 바람은 시원하고 차는 따뜻했다. 대전으로 돌아가 노자를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차담을 마치고 옆에 있는 들녘밥상으로 점심을 먹으러 왔다.



메뉴는 뽕잎백반 단일메뉴.



김치를 담은 정갈함마저도 놀라웠다. 이번 여행에서 먹었던 음식 중 가장 맛있어 각자 밥을 두 그릇씩 뚝딱했는데, 결제할 때 사장님께서 여성 두분이 도합 네 그릇을 먹는 것은 보기 쉬운 광경은 아니었다고.



읍내로 돌아와 지나치기만 했던 행운분식에 들렀다. 사라다빵은 포장을 하고 꽈배기는 바로 뜯어 횡단보도에서 먹었다.



하나로마트에 들렀다가 짜와 찢어졌다.



2박 3일밖에 있지 않았는데도 이제 네비를 찍지 않아도 길이 훤했다. 매번 지나치던 서시교에 붙은 현수막을 다시 봤다. 구례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뜨거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이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어줄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날이 화창하게 개어 구름 사이로 빛이 쬐어나와 멋들어지던 화엄사 계곡을 바라보며 대전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