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치마를 입고

김현철 [32。C 여름] 1992 발매

듣고나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현우, 윤상, 윤종신, 김현철. 중학교 시절, 당시 이 4명의 노총각 중 가장 좋아했던 가수는 단연 이현우였다. (내 기억으론 윤상과 김현철은 더이상 노총각이 아니었다.) 잘생긴 외모에 세련된 타 가수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귀티가 흘렀달까나. 특히나 이현우 9집을 아주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좋아진건 단연 김동률이었지만, 저 네명의 가수 중에선 단연 윤종신이었다. 세련되진 않지만 절절한 멜로디와 가사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되고나선 윤상의 헤어나올 수 없는 세련됨에 묻히고야 말았다.

사실 지금와서 되돌아보면, 내가 왜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그런 시기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것 같다. 저 네명중 가장 optimal 한 장점들을 고루 가지고 있는 발군의 가수는 사실 김현철이었던 것이다! 세련됨, 절절함, 멜로디와 가사, 세션, 사실 종합적으로 확 튀지는 않지만 듣다보면 정말로 헤어나올 수 없는 진국은 그의 음악이었던 걸 왜 난 몰랐을까 싶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가장 좋아하는 김현철의 노래는 ‘거짓말도 보여요’ 일 것 같다. 중학생 때 늘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듣던 테이프에 담긴 그 단 한 곡을 AB 반복재생을 얼마나 했었던지.

이 까만치고를 입고에는 사실 그의 세련됨을 한 스푼 덜 넣었지만 대신 절절함을 두 스푼 더 넣어 놓았다. 어쩌면 검정치마의 이름에 영감을 준건 아닐까 의심도 가는 이 곡은 미국 애리조나 어느 재즈바에서 들려와야 긴 마이크를 잡고 끈적이는 댄스를 추며 들어야만 할 것 같다. (사실 애리조나와 이 곡은 별 연관은 없다. 그냥 느낌이.)

사실 듣다보면 “부르스 부르스” 하는 주현미의 눈물의 부르스와도 비슷한 구절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걸까, 그 구절은 더 애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아직 국내에 기반이 탄탄한 싱어송라이터 중 브라스 세션도 제대로 작편곡 해내는 가수가 없다한 글이 생각난다. 그런 점에 있어선, 난 김현철의 브라스엔 너무나도 열렬한 팬이다. 김동률이 (본인은 적게 쓴다 하는거겠지만) 과한 악기로 치장한 음악을 내놓는 반면 담담한 브라스가 들어간 김현철의 곡들은 대부분 적당한 양의 스시를 먹은 기분이다.

여튼 본의 아니게 말도 안되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내놓았지만, 겨울이 끝나가는 마당에 이런 끈적한 노래 마구 들어도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