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소뜸 / Gilsodom
1986 / Kwon-Taek IM / IMDb / KMDb
★ 3.8
박사과정 말년차 때 한창 유튜브 Korean Diaspora KBS 채널에 올라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생방송 녹화본들을 틀어놓고 논문을 썼었다. 내가 어릴적 TV에서 봤던 생방송들이 83년도에 시작한 프로그램에 줄기를 두고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분단의 아픔이 완전한 개인에게 녹아들어 미시적인 아픔으로 발현한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의의겠지만, 당시 모두가 방송에 탈 수 없기에 손글씨로 attention을 끄는 각양각색의 방법들과 시대상을 반영한 typography를 보는 즐거움도 컸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기에 어떤 농촌에서의 촌극이라 생각했는데, 이 <길소뜸>은 분단으로 인한 현대의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머리가 띵해졌다.
냄새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가장 기쁘게 하고, 나를 가장 슬프게 했던 이들의 냄새. 세월이란 가혹한 운명이 그 냄새의 결을 갈라 놓는다. 어느 순간 우리 인생의 실이 다시 닿아 그 냄새를 맡게 되었을 때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어져버리는 그 안타까움이 인간이 인간이라서 갖는 한계이자 무서움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인 어쩌면 이 영화가 임권택 감독의 최고의 걸작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두 가지가 무척 아쉬웠다. 첫째는 계몽적으로까지 들리는 전무송의 대사와 최불암의 보이스오버. 이 영화는 그런 대사가 없어도 충분히 그 말을 영화의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둘째는 영화 제작 당시 미성년자에 대한 태도로 인한 잡음이다. 이후 배우가 나와 해당 제작 방식에 대해 제기한 문제, 그 후 입을 닫은 감독의 입장. 분명 길소뜸을 아름답고 아련하게 만들어야 하는 필연적인 장면들이었다 생각하지만, 반드시 이런 방법으로밖에 촬영할 수 없었나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겨 아쉽다.
김지영, 신성일, 최불암 같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이 아름다웠다. 물론 이미 40-50대에 이른 장년의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노년에 익숙하다 보니 이른 장년의 모습조차 낯설었다. 가장 큰 수확은 김지미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받게된 것 같다. 오랜 은퇴 후 복귀작이었다는 이 작품에서의 연기만으로도 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질투를 받았는지 충분히 납득했다. 어쩌면 하라 세츠코를 보며 느꼈던 여린 강인함과 비슷한 류의 감정을 느낀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김지미 배우의 운전 실력 무엇..)
정성일 평론가와 정윤철 감독이 나눈 대담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와 <오아시스>를 연결짓는다. 한국 뉴웨이브의 뿌리에 비로소 올라탄 기분이다. 김홍준 영상자료원장의 말따라 나역시 80년대 한국 영화에 대한 경외감을 갖기 시작했다.
정윤철: <오아시스>는, 영화가 끝난 다음에 어떤 비극이 다시 올지는 모른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은 조짐을 보이며 끝난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굉장히 많다. 행복의 조짐으로 끝나는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정성일: 나는 <오아시스>의 마지막을 믿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종두는 감옥에 갔으니 별 네 개를 달고 나올 거다. <오아시스>는 모든 이야기를 한시간만에 빨리 끝내고 그 다음으로 갔어야만 했다. 별 네 개를 달고 나온 전과자가 공주와 행복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런 현실을 견딜 수 있는가. 그 이야기가 있어야만 <오아시스>는 오아시스가 있는지, 너희는 정말 복지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장애인과 더불어 살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그 직전에 끝난다. 종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함께 희망이 보이는 것처럼. 더 망연자실한 것은 그 장면에서 공주가 바닥을 청소하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아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그 쇼트를 결합해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처럼 끝내는 것은 완전한 환상이다. 거기에서 완벽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장애인이 아닌 우리다. 우리를 환상의 구조에 밀어 넣고선, 우리는 공주와 종두가 얼마나 불쌍한지 알고 있어, 우리는 그들을 동정했어, 라고 면죄부를 주는 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같은 사회에서 공존의 방식을 묻고 있는가. <오아시스>가 그저 전과자와 교육받지 못한 여자의 문제라면 거기서 끝나도 된다. 하지만 장애인을 끌어들이고 별넷단 남자를 끌어들였다면, 그들이 정말 이 사회를 견딜 수 있는가를 물어야한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을 생각해보자. 만약 <길소뜸>이 신성일과 김지미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열린 구조이기 때문에 멋있을 수 있었을 거다. 관객은 그들이 아들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길소뜸>은 모든 이야기를 한 시간으로 압축하고 1시간 5분만에 어머니가 쓰레기가 되어 있는 아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저분한 아들을 싫어하고 경멸한다. <길소뜸>은 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 그들은 정말 잘 살았을까, 라는 공존의 문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공존의 정치학을 질문해야하는 시점에서, 왜 영화를 끝내버리는 것인가. 앞의 이야기를 한시간 만에 끝내고 종두가 감옥에서 나왔다면 이 영화를 그렇게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앞의 이야기가 없더라도 관객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질문을 던져야하는 순간 영화를 끝내는 행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왜 이야기를 꺼냈느냐는 거다. 나도 얼마 안되는 원고료를 쪼개 성금을 보내지만, 그런 행동이 스스로도 역겹다. 면죄부를 받는 거거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는 것과 같다. 이 돈을 내면 죄사함을 받을 거야. 그런데 죄가 사해지는가.
- 원문: https://cine21.com/news/view/?mag_id=46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