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 Bhiksuni

1984 / Kwon-Taek IM / KMDb
★ 3.3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故 송길한 작가 추모 상영전으로 열린 <비구니>를 관람했다. 2017년에 동 영화제에서 송길한 작가 회고전이 열리며 디지털 복원되었던 작품이었다.

영화는 40분 남짓한 미완성작으로 영화에 대한 뒷 이야기가 다큐의 형식으로 상영 전에 짤막하게 덧붙여 상영되었다.

당시엔 어벤져스였던 임권택 감독, 정일설 촬영감독, 송길한 작가, 김지미 배우가 함께한 작품이었다 한다. 공정이 20% 정도 진행되었을 때 불교계의 반발로 제작이 중단되며 영원히 잊혀졌는데, 이후에 태흥영화사의 창고를 정리하던 중 필름을 발견하게 되어 복원하게 되었다 한다. 영화 시작 전 짧게 스쳐간 스케줄이 따르면 3/9에 탈고, 4월부터 불교계의 궐기 시작, 6월 제작 중단으로 당시에 급박했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이 영화 전에 <만다라>를 먼저 찍었는데, 그 때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다. 소승의 수행으로 성불하는 만다라에 등장하지 않은 불교의 뒷 이야기를 찍고 싶었다 한다. 영화가 단순히 조계종의 반발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왜 조계종의 반발이 생겼냐 그 줄기를 따라가면 10/26 사태까지 엮여 어떤 어른의 사정이 크게 묶여있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메이킹 뒷 이야기도 함께 등장했다.

김지미 배우는 비운의 영화를 두고 “예술적 작품"을 탄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하셨던데, 이건 좀 나이브한 생각이라는 느낌이었다. 예술적 작품이라는 이유가 붙는다해서 모든 작품의 정당성이 확보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탄압의 이유가 타당했는가, 그 점에 대해 얘기를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런 의미에서 임권택 감독의 인터뷰는 꽤나 괜찮았다. 지금의 나이에 이르르니 어른들의 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다만 작품이 사장된 것이 안타깝다는 말이. 다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은 호인의 느낌이었다.

짧은 복원본에 담긴 풍광이 아름다워 영화의 촬영지가 궁금해졌다. 또각또각 구두의 도시녀가 비구니로 가는 여정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려졌을지도 궁금하다.

촬영이 정말 좋았다. 불상의 어깨에 걸쳐져 법당 안의 사람을 굽어보는 구도. 긴 삭발 시퀀스를 정면과 측면으로 담으며 공간감을 부여. 한국의 돌담을 슥 훑는 카메라 무빙은 나중의 서편제의 밑바탕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영화는 색 보정등으로 디지털 복원되었을뿐 사운드는 분실되어 무성 영화로 상영되었다. 나중에 GV를 다 듣고보니 스크립트가 남아있다 하던데, 왜 별도로 자막을 넣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입모양만으로 영화를 따라가기엔 좀 어렵기도 했다.

짝코, 길소뜸, 만다라로 이어지는 송길한 작가와 임권택 감독의 작품들을 쭉 정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끝나고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의 GV가 있었다. GV는 무척 좋았다. 알게 모르게 이어져 가는 레거시에 대해 생각했다. 송길한/임권택 감독에서 김홍준 원장으로 이어져 내려온 레거시. 그리고 그 레거시를 객석에 앉아 들으며 마음에 새기는 우리들. 직접적인 친분이 있었던게 아니라 하더라도 무형의 유산이 이어져 나간다. 80년대 한국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이 전혀 쑥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김홍준 원장의 고백이 좋았다. 나도 삐까뻔쩍한 국내외 유수의 영화들 뿐만 아니라, 내 근간을 마련해준 크기와 상관없는 좋은 작품들을 좋아한다. 내 뿌리에 대한 프라이드를 좀 더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래는 GV에서 들었던 내용을 정리한 것.

  • 태흥영화사 창고에서 발견한 16mm, 35mm 를 복원했다.
  • GV를 진행하는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송길한 작가와는 훗날 시나리오 강의를 함께 진행했고, 송길한 작가의 남동생인 송능한 감독과는 함께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 출신이라는 송길한 작가와의 세 가지 접점이 있다 한다.
  • GV는 아래 두 권의 책을 기반으로 준비되었는데, 이 중 구술사를 메인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 송길한 작가의 인생에 대한 말들:
    • 아버지가 경성제대 교수셨다. 청년기까지 전주에서 보내다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
    • 전주로 피난을 온 서정주에게 수업을 듣거나, 영화 촬영현장에도 놀러가는 등 영화 제작에 대한 노출이 좀 있었던 편이라 한다.
    • 군에서는 대북 원고를 썼고, 졸업 후에는 도개 탄광의 사무직을 지원했는데 선발이 잘못되어 광부로 보낸 시절도 있었다고. 그런 경험들이 여러 시나리오의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
    • 70년대 검열로 점쳐지는 몰락의 시대를 거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계에 남는 결정.
  • 송길한 작가와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
    •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를 말하길 생계형 주문형 감독이었다고, 요청 받으면 다 찍었던.
    • 국방부에서 어떤 영화를 만들려고 (결국 잘 되지는 않았지만) 두 인물의 안면을 트게 되며 친해졌다 한다. 이후 작품은 엎어졌지만 서로 맞닿은 부분이 있어 작품을 같이 하게 되었다. 다만 서로 조심스러워서 서로를 떠보려 송길한 작가가 임권택 감독에게 어떤 성향의 소설을 읽어보라고 했는데 작품을 재밌게 봤다 해서 같은 과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함. 임권택 감독 입장에서는 이런걸 읽어보라 하네 라는 생각을 하며 가까워 졌다고.
    • 김홍준 원장이 조감독을 하며 알게된 임권택 감독의 말버릇이 있는데, 살아간다가 아니라 살아낸다 라고 말하는 것이라 한다.
    • 임권택 감독은 촬영 현장에 시나리오 작가가 대기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데, 만약 작가가 없다면 감독 스스로가 잦게 수정한다 한다. 후시녹음할 때도 시나리오를 바꾸는 등, 영화가 끝이 나야 진짜 끝나는 스타일. 송길한 작가는 대부분 촬영 현장에 함께하는 작가였고, 그런 의미에서 서로에게 이상적인 파트너였다고.
  • 그런 의미에서 이 <비구니>라는 영화가 엎어진 것은 두 사람에게 꽤나 큰 좌절이었을 것이다. 이미 촬영된 것까지만 봐도 꽤나 블록버스터에 가까운 큰 결심을 하고 찍게된 작품인데. 영화가 엎어지고 무척 비참해지는 순간이었다. 너무 꺾여버려서 뭘 해도 안되나보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 송길한 작가는 말년에 두 가지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결국 미완으로 남았다.
    • 최인훈의 <광장>을 각색하고 싶어했다.
    • 여순반란을 담은 <반란> 이라는 작품의 작업. 결국 영화화 되지 않은 시나리오라고.

시놉시스
1984년 불교계의 반발로 제작이 중단된 임권택의 <비구니> 부분복원판. 출가한 여인의 번뇌, 구원을 향한 일생의 여정을 담았다. 미완성작이다.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다큐멘터리도 함께 상영된다.
원문 링크: https://www.jeonjufest.kr/db/movieView.asp?idx=5698

리뷰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가 송길한 작가 회고전을 맞아 미완성작임에도 불구하고 <비구니>를 디지털 복원해 상영한 것은 이 영화에 담긴 남다른 예술혼을 통해 ‘좌절된 걸작’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많은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구니>가 예정대로 완성됐다면 이 영화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최고의 작품이 됐을 수 있었다. 故송길한 작가는 2014년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실린 정성일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과장된 소리가 아니라 적어도 이게 완성되었다면 우리 작품을 밖으로 보여주는데 그 시간이 상당히 단축되었을 것이다, 난 그렇게 믿어요”라고 말했다. <비구니>가 칸영화제 같은 곳에 진출해 1980년대 초반부터 임권택 감독과 한국영화를 세계적으로 알렸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가정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전체 공정의 20%만 진행됐지만 <비구니>의 복원본을 보면 대단한 구석이 느껴진다. 특히 애초 이 영화를 직접 제작하려고 했다는 주연 김지미의 눈빛은 너무나도 형형해 사운드가 없다는 사실이 체감되지 않을 정도다. 40분 남짓한 복원판이 담겨있고 앞머리에는 이 영화를 둘러싼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실렸다. 송길한 작가의 생전 모습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상영 뒤에는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이 참여해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된다. (문석)
원문 링크: https://www.jeonjufest.kr/db/movieView.asp?idx=5698

[전주 리뷰] 한국의 정체성을 탐문하는 수행의 여로: 〈비구니〉에 담긴 작가 송길한의 세계

글: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원문 링크: https://jeonjureview.jeonjufest.kr/post/4

2024년 12월 22일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가 생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전주국제영화제가 기획한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회고전을 준비하던 2017년 겨울, 송길한의 평창동 집 근처 막걸리 주점에서 〈비구니〉를 화제로 삼아 대화를 나누다가 한 이야기이다. “쓰레기 같은 세상은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돌아가지 않아.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는 거야.”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치밀하게 주장된 거짓에 맞서고, 소외된 정체성의 무게를 직시한 이 작가에게 어울리는 일갈이었다. 그에 관한 단행본과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송길한이 쓴 많은 계시적인 각본에 이와 같은 시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완성 영화 〈비구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꼼꼼하게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작가의 세계관을 응집한 작품이었다. 분량의 20% 정도를 촬영하고 불교계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된 이 영화에서 송길한은 한 출가 여승의 인생유전 스토리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투사한다. 인간의 삶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 또는 역사의 격랑을 통과하는 인간의 삶을 기리는 〈비구니〉는 파손된 유적처럼 조각난 대여섯 개의 장면을 빌미로 전체를 추정해야 하는 형태로만 남아 있다. 사운드가 유실된 생필름을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복원하여 무성영화 형식으로 제작한 영화에 따르면, 〈비구니〉는 탈속의 제스처 안에서 구제의 길을 찾는 수행자의 궤도를 추적하는 송길한 세계의 본류를 담고 있다. 39분 길이의 영화는 김지미가 분한 주인공 수연이 속세에서의 인연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사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하는 시퀀스를 필두로 하여 비구니가 된 수연이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 가족 무덤 앞에서 제사를 올리는 신, 한국전쟁 때 버려진 고아들을 건사하며 피난을 떠나는 신, 사라지지 않는 욕망을 다스리기 위한 고투의 과정 등을 묘사한다. 집착을 버리려는 수연의 불안과 번민, 혼란한 세상의 한복판에 던져진 존재의 비의, 그리고 개인과 역사의 상호 작용이 날카로운 정밀성을 가지고 어우러진 모습이다.

〈비구니〉는 1980년대 예술적 각성의 길을 개척하던 임권택 감독의 날 선 작가 의식과 송길한의 역량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확인되는 송길한의 일관된 작가적 관심사는 개인과 역사가 만나는 상상의 장소이다. 종종 그의 영화가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것은 육체적, 사회적, 도덕적 갈등의 해소에 대한 갈망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미완의 기획을 연장하고자 한 대체제가 〈길소뜸〉(1986)이었다. 〈비구니〉를 통해 펼쳐 내지 못했던 전언이 번안된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 송길한은 노스탤지어를 상실한 여인의 정체성 찾기 여정을 장대한 스타일로 묘사했다. 〈비구니〉에서 품었던 뜻이 좌절된 직후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김지미가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을 연기한 점 등 여러모로 두 영화의 연관성은 작지 않다. 〈비구니〉의 비전 안에는 역사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지만, 단순히 묵직한 주제 의식만 앞세운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세속적인 구원의 사랑과 연대에 대한 비전을 보여 준다. 송길한은 오랜 시간 동안 불길한 세상에서 꿋꿋이 자신을 단련하였고, 굴하지 않는 인간성을 지녔으며, 종래에는 초월적인 각성에 도달하는 인간의 진화를 담아내려 했다.

〈비구니〉가 기획된 1980년대 초반은 한국 영화계에 있어 주목할 만한 시대였다. 한편으로는 배창호와 이장호의 흥행 영화들이 맹위를 떨치며 대중영화에 대한 자각이 일었고, 임권택으로 대표되는 작가 의식의 각성이 다른 한 편에 있었다. 뭉뚱그려 ‘코리안 뉴웨이브’라고 불린 새로운 조류의 핵심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정의에 있다. 한국인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가, 한국인의 의식과 철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영화의 에센스는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이 당대 한국영화의 중심 의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인간을 바라보는 송길한의 관점을 보여 주는 핵심어이다. 〈비구니〉에서 미처 다 드러나지 못한 송길한의 개성은 전작 〈만다라〉(1981)와 〈길소뜸〉, 〈티켓〉(1986), 〈씨받이〉(1987), 〈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 그가 쓴 많은 여로형 스토리에 녹아 있다. 그가 지어낸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이동하는 감각을 통한 내러티브 형상화에 있다. 드문드문 건너뛰는 삽화형 서사를 즐겨 쓴 송길한은 내셔널 시네마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조사와 탐문의 서사를 〈비구니〉에서 활용한다. 짧은 필름 안에 다수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남는다. 삭발 의식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인 세밀함을 수록한 롱테이크, 속세에 대한 미련을 떨쳐 내듯 비구니가 된 수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여 주는 클로즈업, 그리고 삭풍한설의 험로(險路)를 통과하는 수연을 보여 주는 롱숏 등은 연출 임권택‐촬영 정일성과 함께 이루어 낸 시각적인 승리이다. 그 감정적 힘과 미묘함을 가지고 송길한은 개인의 구도라는 단계를 넘어 한국사에 착종된 복잡한 정체성의 의미에 다가가려 했다.

복원판 〈비구니〉에 담긴 의미는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의 회고전에 즈음하여 한 인터뷰에서 송길한 자신이 완벽하게 요약했다. “토막 나서 부서진 영화를 관객들 나름대로의 이미지로 완성해 보면 어떨까.” 여기서 송길한의 성취는 한국이 안전과 번영을 누리는 국가로 발전하는 시기 그 반대의 것, 즉 억압, 대결, 착취, 폭력에 감싸여 있었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데에 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해야 하는 〈비구니〉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면서 ‘스토리’보다 ‘시’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연상하도록 한다. 송길한의 당대 작품들처럼 이 영화는 구도적 삶을 탐구하며 인간의 고뇌에 서린 다면적인 원인을 추적한다. 송길한‐임권택의 협력 관계를 중심으로 보자면, 〈만다라〉에서 확립된 주제와 도식을 반영하여 〈길소뜸〉과 〈티켓〉으로 잇는 가교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열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지나는 이들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김지미가 연기하였고, 폭력과 무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자기 정화에 도달하는 인간, 특별히 여성의 삶을 조망한다. 그들이 지나야 했던 억압과 모욕을 이 영화도 감수했지만, 고통의 순환을 플로팅한 원형적인 스토리로 인간의 정신과 정체성을 파고든 송길한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