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 Mickey 17

2025 / Joon Ho BONG / IMDb / KMDb
★ 3.8

미래의 구원자

안개 속의 미래를 구할 구원자가 더 발전된 우리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라는 사실을, 연민과 사랑과 공정한 원칙이 있다면 지금 우리 스스로도 충분하고 말한다.

테라포밍과 현재, 그리고 과거의 지구

재밌는 발상이라 생각했다. 공상과학 영화가 으레 갖는 공격의 여지를 초장에 잡고가는 틈을 메꾸는 실력도 좋았다. 그래서 온전히 영화가 이끄는 서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테라포밍이고 자시고 지금 봉준호는 테라포밍이 필요한 “우리"가 궁금하지, 그 이외는 상상의 여백으로 남겨버린다. 봉준호답다고 생각했다.

미키17의 존재라는 단 하나의 플롯에만 집중하지 않고, 여러 주제를 건드리고 있어 후반엔 머리가 좀 지끈하기도 했다. 이따금씩 요즘 미국과 유럽에서 들려오는 뉴스가 더 어메이징해 <미키 17>은 동화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과거의 인간들을 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개척과 깃발꽂기에 여념없던 사람들. 크리퍼라는 원주민과 여러 인종들이 탑승한 우주선.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 연이 연기한 티모가 이분법적인 나누기의 오독에 빠지지 않도록한 영리한 설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듦새

로퍼트 패틴슨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개봉 전부터 봉준호 감독이 로퍼트 패틴슨을 송강호화 시켰다는 얘기를 들어 더 기대가 되었었는데, 기대보다도 더 좋았다.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에 너무 녹아들어 그렇지, 영화에 등장한 거의 대부분의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다. 아주 이따금씩 창문을 깨며 극임을 상기시킬 때가 있긴 했는데 그럼에도 좋았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을 등장시키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병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여김 없이 등장한다. CG가 완전히 튀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이런 만화적인 모션과 렌더링을 좋아해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단 생각이 들었다. 눈밭을 가득 채운 크리퍼들을 레트로한 모니터로 보고 있자니 이응노 화백의 그림 같았다.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보니 DNEG에서 작업을 한 것 같은데 쇼릴이 궁금해졌다.

음악이 영화와 무척 잘 어우러진다 생각했다. 무척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정재일이 점점 더 물이 오르는 것인지, 내려가는 것인지 머리가 기우뚱해지긴 했다. 좀 더 낯설게하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 영화의 OST는 다시 원 안으로 걸어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OST를 반복해 들을만큼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편집. 기발한 상상과 재치있는 서사를 맥빠지게 만드는 포인트가 여럿 있었다. 인물들이 갑자기 너무 투머치토커가 되거나, 대화나 움직임에서 전혀 리듬감을 느낄 수 없을 때 집중을 잃게 되기도 했다. 전작 <기생충>에서 마음껏 판을 깔고 춤을 추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맥이 빠지는 편집이었다. 영화에서 15분은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너지의 낭비와 사랑, 그리고 원칙

요즘 이따금씩 생각하는 세 가지의 키워드가 영화에 등장해 화들짝 놀랐다.

첫 번째는 “에너지의 낭비”. 좋은 음식과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먹고 복싱장에 가거나 웨이트를 할 때 오는 현타가 가끔 있다. 완전한 노동과 가치의 생산을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던 아주 먼 옛날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기껏 채워넣고 어떤 사회적인 가치를 위해 소모시켜버리는 행동들. 그런 의미에서 “낭비"가 아닌 “유의미한 소모"를 위해 바뀌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최소한 신경물질적으로라도 유의미한 가치를 얻어, 다른 일상의 모듈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모였으면 하는 그런 생각들. 소모에 대한 자각 없이 살다가 맞이할 먼 훗날의 웃플 모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웨이트를 하기 위해 음식을 소모할 사람들은 생식을 할 수 없고, 프로틴바만 먹을 수 있다거나 하는 그런 봉준호식 사회적 합의를)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여러가지 키워드를 뭉뚱그린 말이 “사랑"이라면, 그 뭉뚱그려진 키워드는 무엇일지 reverse engineering을 해보곤 한다. 아직까지는 연민과 동경 두 가지 정도만 알아낸 것 같은데,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크리퍼를 보며 크리퍼에 대한 사랑은 어떤 키워드의 중첩일지를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게 프린트된 인간이든 크리퍼이든 다양한 모양의 사랑과 그 사랑의 아름다움에 대해 듬뿍 느끼는 시간이었다.

원칙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티브 박이 맡은 지크 덕분에 깨닫게 된 주제 중 하나였다. 공정한 원칙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지켜지는 가치들. 그런데 그 “공정한 원칙"이라는 것이 너무 어려운 말이란 생각이었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멀티플 상태인 미키들은 즉시 제거되어야 했을텐데 그들의 공존은 연민이라는 가치로 인해 무너질 수 있는 원칙인가. 마샬 부부는 악의 축이니까 원칙에 따라 처결되는 것이 당연한가. 세상에 중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에, 결국 조금이라도 그 intangible한 선에 가까워 지기 위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하는 것일까, 그런 여러 단상에 빠지기도 했다.

인간 존재의 철학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존재의 철학에 대해 심도있는 토론을 하고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봤던 <서브스턴스>를 떠올리기도 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해서 죽는 것의 가치의 문턱이 낮아지는가. 공급이 많아져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경제학적인 물음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 죽는다 해도 하느님의 품으로, 천국으로 향해 또다른 나를 얻을 수 있는데 인간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종교적인 물음이 생기기도 했다. 결국 스스로 죽기 전까지 풀리지 않을 질문. 어쩌면 죽는다해도 영원히 알 수 없는 대답.

영화 자체는 그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먹먹하고 서글펐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좀 울컥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나이가 들어가며 보게되어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