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 Concrete Utopia

2023 / Tae-hwa Eom / IMDb / KMDb
★ 4.0

나와 내 사람의 목에 점점 칼이 가까워져 오는데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가볍고 무거운가. 잠깐, 그런데 다가오는 것이 칼은 맞는가?

일단.. 엄태화 감독은 기본적으로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명장들의 초기 작품을 볼 때 느꼈던 소위 아다리가 딱딱 맞는 매끈한 마감을 가진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 기분이 일부 구간에서만 든게 아니라 영화의 시작부터 엔딩까지 쭉 이어졌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굵지 않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한 뒷심과 봉합이 부족하다 느껴졌다. 발산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초중반에 보여졌던 이야기의 밸런스가 후반에 들어 급격하게 무너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KBS 다큐 <모던코리아>의 영상으로 시작되어 화들짝 놀랐다. 벌써 <모던코리아>를 본게 4년 전이라니. 그 땐 박사과정 학생이었고, CityCraft가 막 논문으로 퍼블리쉬된 후였다. 이 영화의 시작에 모던코리아가 영감을 주었을지, 혹은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모던코리아를 발견하게 되었을지, 선후관계가 궁금하다.

VFX가 튀지 않고 좋았다. 크레딧을 보니 엔진비주얼웨이브가 큰 틀을 잡고 꽤 많은 서브 업체들이 작업에 참여했나보다 추측했다. 특히나 좋았던것은 음악과 사운드 믹싱. 와 진짜,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귀를 압도하는 정말 좋은 선곡과 합성이었다. 김해원 음악감독의 첫 블록버스터 입봉작이라니!

몇몇 장면의 촬영 구도가 좋았다. 이건 촬영감독의 단독 결정이라기보다 엄태화 감독의 주문이었을거란 생각을 했다. 특히 좋았던 장면은 황궁아파트에서 열린 잔치에서 이병헌이 맡은 김영탁이 연설을 하는 장면이었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카메라는 이병헌을 천천히 클로즈업하며 그의 얼굴만을 담는다. 그러면서 그의 과거가 플래시백되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데, 연결된 세 장면을 모두 극대화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최근들어 개봉했던 한국 영화의 감독들은 분명 아파트 주민들을 하나하나 클로즈업하거나, 전체샷을 담고 싶어 컷으로 잘라붙이고 싶어 안달났을텐데, 엄태화 감독은 이걸 참아? 싶게 좋았다.

김선영 배우가 마이크를 들고 가이드라인을 읊으며 주민들이 화보의 구도로 화면을 바라보는 장면도 좋았다. 분명 어디선가 많이 본 포스터의 구도인데 이름을 대기 어렵다. 어떤 예술 작품을 레퍼했을지 궁금하다. 너무 튀지 않고 재기발랄했다.

모세범도, 명화도, 결국 다시 아파트로 들어가는 사람들. 타의가 아닌 자의로 들어가는 사람들.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 몰입에 방해가 없었다.

스포 방지

좋지 않았던 점을 적으려니, 스포 같아 따로 적어본다.

생존을 위해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선택한 방법은 그들이 정한 가이드라인, 가이드라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지도자를 중심으로 유지하는 체제. 여느 체제가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과격해지고, 단체주의를 넘어서는 광기가 보여진다.

엄태화 감독은 황궁아파트 내에서 다양한 인간 군집을 만들어 관계를 쌓는다. 정말 영리하게 어떤 한 군집을 절대선으로 묘사하지 않고 모든 군집의 당위성의 밸런스를 맞추려 노력한다. 인간의 존엄성, 물론 너무 중요한데 나와 내 사람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저울의 양쪽에 둬야한다면. 인간의 존엄을 지키지 않고 지속되는 삶은 무의미하며 차라리 삶을 포기하리라 말하기에 우리는 꽤 모질지 못하다. 이 영화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고, 내가 아닌 타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그렇게 밸런스를 잘 잡아가던 감독이 후반에 들어 민성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명화에게 힘을 싣는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게 명화의 시선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가 잘못 알아들었던 걸까 싶을만큼. 명화라는 캐릭터가 너무 불분명하다. 그저 내가 너무 말뿐인 이상주의자를 곱게보지 못한 탓일까. 현실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렇게 해야 한다구요!” 만을 외치는 완전한 P의 떼처럼 느껴졌다. 황궁아파트 밖엔 정강이뼈를 뜯고있는 엄태구가 득실한데. 초중반의 묘사가 좀 더 달라졌다면 괜찮았을까.

나와 내 사람의 목에 점점 가까워져 오는 칼이 사실 우리가 스스로 겨눈 칼이었다는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후반이 풀어나가졌다면. 꽤나 괜찮은 영화였기에 그런 점에 있어 무척 아쉬웠다. 봉준호였다면, 절대 이대로 개봉하지는 않았을 것같아 더 아쉬움을 남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