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도질

일을 엄청 잘게 잘라놓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일들에 번호를 붙여 분더리스트나, 트렐로에 넣어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너무 잘 까먹는 습관, 그리고 거대한 산이 눈앞에 놓이면 오르기를 망설이는 습관에서 비롯한 것 같다.

리비전을 끝내버리려 학교에 나왔다. 사실 얕은 산이라 계속 얕봤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게 큰일이었다. 큰 숨을 한번 내쉬고 투두리스트를 난도질했더니 진도가 좀 쑥쑥 나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너무 흥청망청 놀고싶으니 스스로를 가두는 의미로, 매일 수첩에 한장씩 엄청 세분화해 적고선 동그라미치며 채찍질했던 것 같다.

하나의 카드를 난도질해 여러 카드로 만드는 건 prezi 에서 제대로 경험한 것 같은데, 그때의 경험이 꽤나 유용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몸도 마음도 세 뼘은 성장했던 것 같다. 혼자서 보낸 인내의 시간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알게모르게 큰 도움이 많이 되었던 팀 사람들이 갑자기 고마워진다. 다들 잘들 사는지.

어제부턴 문득문득 아자부주반에서 롯본기로 올라가는 언덕 길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린다. 포탈에 올라온 TKT 선발 공고때문인건지, 문득 튀어나온 일본에서의 추억을 담은 물건들 때문인지. 그 순간에는 100% 완전 행복한 순간으로 느껴졌던 건 아니지만, 추억속에서 오래 묵혀질 수록 향기가 더해가는 그런 순간이었나보다. 석양이 멋져서였던 걸로 생각해야겠다.

요즘엔 좋아했던 순간들, 장소들을 현실에서 다시 반추하기엔 내가 아직 좀 덜 단단하구나란 생각을 하고있다. 예전엔 ‘으아!!! 더 단단해져야하는데 너무 게으르다 게을러.’ 생각뿐이었다면, 요즘들어선 이런 무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뭐랄까.. 상처가 나 딱지가 앉은 곳을 잘 치료할 생각보다, 딱지를 슬슬 긁으며 기분 좋아하는 그런 이상한 중독은 아닐까 걱정되지만. 암튼 그런 의미로 2월에 도쿄나 놀러가볼까 생각했지만 접었다. 분명 가서는 행복하겠지만, 돌아올 때 너무 우울해질 것 같아서.

오늘 와서 해치워야 하는 네 개의 질문 중 절반을 해치웠다. 이제 두 개만 남았다. 얼른 끝내고 집에 가야겠다. 어제 사다놓은 맥주가 너무 많이 남았다.

거짓말을 잘 못해서, 이렇게밖에 로그를 못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