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 As I Lay Dying

William Faulkner / KOBIC / ISBN-13

2020년 10월에 투두 리스트에 담아두고선 이 때까지 볼 기회가 없었다. 신기하게도 전자책으로도 종이책으로도 마주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달 초에 IBS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서는 냉큼 빌려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81번인데 왜 그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것인지는 미스테리지만. 대전, 대구, 강릉을 오가며 틈이 날 때마다 읽었다.

서술자가 섹션마다 번갈아 바뀌며 해당 서술자의 이름이 그 섹션의 제목으로 붙어있다. 첫 서술자는 둘 째 아들인 “달"이었는데, 책에 대한 아무 사전지식이 없다보니 그 “달"의 의미가 Moon인지 Darl인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가면서부터 그게 인물의 이름이라는 것을 캐치하기 시작했다.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나"는 가족의 엄마인데, 이미 소설의 초반부터 운명을 달리하기에 앞으로의 이야기가 심령스토리가 되는 것인지 동공지진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과론적으로 한 챕터에서 서술자로 등장하는 구조인데 그 챕터 덕분에 제목부터 구성까지 모든 구슬이 촤르륵 엮여지는 것만 같았다. 이게 노벨상 작가의 솜씨인가 놀라기도.

어디 하나 멀쩡한 트랙의 인생을 사는 이가 없어 보였다. 그런 이들이 죽은 엄마의 관을 싣고 불어난 강을 건너고 악취를 풍기며, 엄마가 자신을 묻어달라 말했던 제퍼슨까지 9일 동안 마차를 끌고 가는 여정. 모두가 어디 하나 나사 풀린 사람처럼 보이기에, 점차 광기에 물들어 간다는 “달"이 미쳐가고 있다는 인상조차 크게 받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묶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생사를 넘나드는데, 결과적으로 누가 어느 정신병원으로 이송되건, 범죄를 당하건, 의치를 해넣고 새엄마를 맞이하는 데서 느껴지는 인간의 어떤 근원적인 생존을 위한 이기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생존이 무슨 의미일까.

우당탕탕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묻어났는데, 그게 이 작가의 특징이자 장점이라는 것을 책을 모두 끝내고서야 알게되었다. 전집 뒤에 붙은 짤막한 작품해설이 너무 훌륭해 마치 또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이 작품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는 어머니의 존재도 사멸과 함께 잊혀지는 정황은 삶에 대한 허무적 인식을 바닥에 깔고 있다.
(중략)
존재의 무게를 되도록 가볍게 다루고 싶어 하는 오늘날의 문학에 비해 포크너의 작품은 지나치게 진지하게 느껴질 수 있다. 혹은 무한히 확장되는 해석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최근의 소설들 속에서 포크너 문학은 과도하게 교훈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언어를 불신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문학을 신뢰하고 있으며, 삶의 무의미함에 절망하면서도 여전히 더불어 사랑하는 삶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크너가 죽은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에도 포크너를 말하는 것이 유의미한 까닭은 인간에게 항존하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명석한데 삶에 대한 성찰과 느낌이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포크너를 권하고 싶다. 한 점으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존재가 확대되는 기쁜 체험이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