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 브뤼노 몽생종 저 (이세욱 역)

도서관 날짜를 다시 확인해보니 처음 빌린 것이 작년 12월의 일이었다. 일년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며, 결국엔 다 읽게 되었다. 다 읽게 되었다보다, 읽을 수 있는 부분을 다 읽게 되었다 라고 말하는게 좋겠다.

순전히 밀회덕분에 알게되고 듣게되고 읽게되었지만 종내에는 리흐테르라는 인물에 감동해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재능보다 노력을 더 귀하게 여긴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감탄의 연속이었다. 읽는 내내 좀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책의 절반가까이는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이후로 연습하고 연주해온 모든 곡에 대한 그의 빼곡한 노트가 책의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내가 이렇게 무지하구나란 생각을 들게 만들기도 했다. 아마 내년 일과시간 내내 들어도 다 들을 수 없을 것이다. 하긴, 한 사람의 인생을 내가 1년만에 들어보겠다 하는 것도 무척이나 큰 요행이구나.

토론토에서 보고온 글렌 굴드의 동상이 생각나기도 했다. 서로를 알아보는 멋진 사람들이 참 멋져보였다.

어쨌거나, 한 드라마때문에 시작했지만 결국 드라마는 잊혀지고 예술가만 남긴 정말 멋진 책이었다. 1년동안 아주 천천히 곱씹으며 읽을 수 있어 행복했다. 좋았던 구절을 덧붙인다.

편집자 서문에서
내가 할 일은 하나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귀납적으로 작성된 하나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되도록 견고하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길이가 상당한 구조를 만들어야 했다. 한 단어씩 그리고 한 문장씩 편집을 해 나감으로써 대단히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한 인물의 실루엣을 차츰차츰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그의 초상을 그려내야 했다. 구조 전체를 주도하는 요소를 찾아내어 연속적이거나 중층적인 다수의 테마를 서로 결합하는 것, 긴장과 이완의 순간들을 결정하는 것, 사실과 관념으로 이루어진 다성부 음악을 조화롭게 구성하는 것, 영화를 결말까지 실어갈 큰 물결을 포착하는 것이 나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요컨대, 나는 내 교향곡의 주제와 관련된 재료들을 한데 모은 셈이었다. 남은 건 그 교향곡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영화의 편집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정의 대상이 되었다.편집을 시작할 때 내가 분명하게 마음을 정하고 있던 것은 단 한가지였다. 즉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Bb 장조) 중에서 느린 악장의 처음 몇 소절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가 시작되고 같은 악장의 마지막 몇 소절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가 끝나리라는 것이었다. 당초부터 이런 확신이 들었던 것은 듣는 이의 마음을 옥죄는 이 소나타야말로 작곡자 슈베르트와 연주자 리흐테르의 가장 숭고한 성취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7. 국경을 넘어
나중에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연습을 많이 하다 보면 ‘물이 끓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요컨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나라에 도착하면 나는 지도를 펼쳐 놓고 나에게 무언가를 연상시키거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들을 흥행사들에게 가리킨다. 가능하다면 내가 아직 가 볼 기회를 갖지 못한 장소들을 말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떠난다. 피아노를 실은 차가 우리 뒤를 따른다. 우리는 마치 역병을 피하기라도 하듯 고속도로를 피해서 이동한다. 그러면서 나는 로안이나 몽뤼송이나 프로방스 지방의 한 귀퉁이에서 연주를 한다. 연주회장은 극장이 될 수도 있고, 예배당이나 교정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연주회에는 적어도 한 가지 장점이 있다. 사람들이 거기에 오는 것은 속물 근성 때문이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9. 거울
또한 나는 오래 전에 게르만 식의 현학 취미를 드러내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렇게 결심한 바있다. 하루에 세 시간씩 피아노 치는 것을 나의 순항속도로 삼으리라고 말이다. 그 뒤로 나는 지킬 수 있는 한 그 규칙을 지켜 왔다.

러시아어판 서문
다의미적이고 다원적인 특성을 지녔던 만큼 리흐테르는 어떤 특정한 민족에 속하지 않았으니, 다시 말해, 모든 미족에 다 속했던 것이다. 그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문화로부터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자기 내부로 흡수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었으면서도 어디에서나 편안하게 지냈다.

옮긴이의 말
리흐테르는 어느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든 그 작곡가의 특성을 가장 잘 살려낸 연주자로 평가받는다. 그 비결은 이 책에서 리흐테르가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듯이 악보를 충실하게 읽는 데에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표현력이 풍부한 거장이었지만, ‘음표를 읽을 줄 안다’는 것을 연주자의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여겼다. 악보에 더없이 충실한 연주를 하면서도 ‘첫 음만 들어도 그의 연주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강한 개성을 견지했다는 사실. 리흐테르의 가장 큰 신비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