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시드니! / 무라카미 하루키

지난 시드니 여행 전에 꼭 다 읽고 가려 했는데, 이제서야 다 읽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도 읽고 있었으니 장장 4개월에 걸쳐 읽었구나.

매일을 아주 조금씩 읽었는데, 덕분에 4개월동안 올림픽을 치루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폐막식을 끝내고 그 후의 에필로그를 읽은 느낌이라 조금은 허무하고 공허한 느낌이 맴돈다.

하루키의 소설은 소설마다 호불호가 나뉘지만, 수필만큼은 대부분 무난하고도 즐겁게 읽힌다. 읽는내내 도부기체라던가, 김소영 교수님의 칼럼체가 생각났다. (도담아 이젠 더이상 블로그에 글은 안 쓰는거야? 아쉽..)

내가 보고온 시드니와 다르게 읽힌 것은, 시간의 차이일지 시각의 차이였을지. 시드니에 도착하기 전 다 읽어버렸다면 나의 시드니여행은 꽤나 달라졌겠지?

시드니 호텔에 머무는동안 그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시간도, 생각도 못했다는 하루키. 덕분에 수없이 언급되던 음악은 가뭄에 콩나듯 얼굴을 비췄다. 생각해보면 그마저도 등장한게 어딘가 싶기도 하고. 요상하게도 책을 다 읽은 후에는 하루키의 재즈가 듣고싶어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 재즈편을 틀었다.

내 책상 위 빨간 베이비그란도 위에 앞으로 읽을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바로당장은 손을 못 댈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 글이, 꽤나 여운이 길게 남는다.

긴 여운은 분명 단순한 시드니 방문기를 벗어난 구성때문일 것이다. 더 큰 도약을 꿈꿀 수 있는 패잔병을 바라보는 시점과 실제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나 위키피디아 재팬이 맞물려 어쩌면 나는 꽤나 큰 충격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가, 결국 그들과 궤를 나란히 할 지, 4년 뒤 올림픽에 다시 도전하게될 지. 그 미래가 뒤숭숭해 안절부절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 미래는 지금의 내가 결정하는 것이겠지만.

기억의 남는 구절들.

p.216

나카타의 슛이 빗나가서(아슬아슬했지만 골대에 맞았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끝. 일본은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오늘은 야구도 그렇고 축구도 그렇고, 연장전까지 가서 결국은 지는 패턴이었다. 좋은 시합이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지쳤다. 좋은 시합도 지친다. 특히 진 시합에는.

p.353-354

여러분, 드디어 내일부터 일을 합니다, 라는 신문 기사가 있었다. 올림픽에 푹 빠졌던 사람들이 일상 복귀를 하는 데 필요한 목록이다.

  1. 이제 생글생글 웃지 않아도 됩니다. 다 끝났으니까. (외국에서 오는 손님에게 우리 모두 상냥하게 웃어요, 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상냥했다.)

  2. 셔츠를 다려놓고 일찌감치 침대에 눕습니다. 내일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3. 사만 육천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은 쉽게 일상으로 복귀하기 어려운 정신 상태입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가르쳐주려고 멍한 눈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발견하면 당국에 보고해주세요. 보호하겠습니다.

  4. 응원용 복장은 지금 당장 버리세요. 국기 망토나 와펜식 국기 문신이나 자원 봉사 유니폼은 일상적인 사회생활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5. 이번 주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멍하니 지낼 것을 추천합니다.

  6. 지도를 거꾸로 들고 난처해하는 여행자를 보더라도 내버려두세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가면 됩니다.

  7. 노숙자를 보면 생긋 웃어주세요. 그들도 드디어 거리에 나올 수 있게 됐으니까(정말 그랬다).

  8. 시드니 서부 교외의 추억을 가슴에 꼭꼭 새겨두세요. 아마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테니까(올림픽 공원이 있는 시드니 서부 교외는 그다지 컬러풀하다고는 할 수 없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일본이라면 세이부 이케부쿠로 선 부근을 상상하면 될까).

p.358

카메룬 인구는 천오백만 명으로 그중 40퍼센트는 ‘여기서부터는 가난함’이라는 선 아래쪽에서 생활한다.

p.375

우리는 모두 -좋든 실든- 자기 내면의 악령과 함께 산다. 이 악령은 때때로 악몽이라는 형태로 우리 인생에 나타난다. 누구나 살면서 몇 번은 이 악몽을 만나고 어떻게든 이겨냈다. 내가 이 인터뷰를 마친 뒤에 생각한 것은 이누부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 악몽과 마주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p.394

우리는 모두 -거의 모두라는 뜻이지만- 자신의 약점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 약점을 지울 수도 없앨 수도 없다. 그 약점은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딘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슬쩍 감춰둘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보아 그런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행동은 약점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정면으로 받아들여 약점을 자신의 내부로 잘 끌어들이는 것뿐이다. 약점에 발목 잡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디딤돌로 새로이 구성해 자신을 좀더 높은 곳으로 끌고 가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깊이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