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음

아침에 일어나 새 입욕제로 목욕을 했다. 색만 봐서는 크리스마스느낌 가득풍이었는데, 넣고보니 무척 화한 맨솔풍이었다. 덕분에 하루를 이성적(?)으로 시작하게된 기분. 김지운의 숏컷의 마지막 챕터만을 남겨놓고 목욕을 마쳤다.

얼마전 원총 회의에서 사업 후 남은 상품권의 수량을 정리해, 이번 연환실에서 어떻게 쓸 것인지 얼마를 더 구입해야하는지 이야기가 나왔다. 예를 들면, 투썸 150장, 던킨 250장, 롯데리아 300장 뭐 이런 식의 물품과 수량을 늘어놓는 대화였는데, 웃음이 팡 터져버렸다. 유기 이백 죽, 호피 삼십 장, 수달피 오백 장, 지물 천연 화문석 이백 장, 명주 삼백 필, 모시 백 필, 인삼 오백 근 을 외치던 상도가 생각나버렸다. 아.. 상도 정주행하고싶다. 겨울에 상도라니, 이상할 것 같다.

물속에 잠겨서 몇 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매 주기의 끝에서 ‘아.. 그래도 다음 주기엔 좀 더 담담하게 굴 수 있겠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 위안을 했는데, 막상 다음 주기가 되어도 내 스스로는 별로 변한게 없이 속수무책이라 음.. 아무래도 이거 영고인걸까? 한 삼십년 지나면 더 괜찮아 지려나? 오만가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답으로 가는 방법을 몰라 고생중이다. 가라앉은 사람이 되고싶다.

어제 문화행사를 보며 계속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을 생각했다. 그렇게 막 좋아하는 영화도 아닌데, 영화 속 대사 하나가 불현듯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정확한 워딩은 생각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정적인 환경에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여주인공이 내뱉는 ‘왜 전 남편이 자살했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는 생각치도 못했던 질문이 바로 그 대사이다. 너무나도 평탄하게 흘러가, 아주 살짝 내비치던 abnormality 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흘려보낸 순간들을 떠올렸다. 어떻게 그것들을 다 캐치하겠냐만은 부메랑으로 돌아오는건 좀 아프니까, 뭔가 액션을 취하든가 아님 액션이 나올 상황을 피해버리든가. 모르겠다.

날이 점점 추워지는게 느껴진다. 출퇴근길에 정영음을 한편씩 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매년 이맘때쯤 두세편씩은 들어왔던 것도 같고. 뭐랄까.. 신종 도피처같은 느낌이랄까. 감사한 마음 죄송한 마음 반반. 사실 거짓말이다. 충대 뒤로 돌아 출근할 때마다 정영음을 생각했다. 요양병원을 지나 신성동으로 크게 좌회전할 땐 어쩔 수 없이 정은임 아나운서가 떠오른다. 휴.. 밤엔 꼭 한 편 듣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