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74

스스로가 초라하고, 가엾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되는 일도 없는데, 불평만 하고 있고 책임은 지기 싫으면서 남을 배려하지도 않는 하루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소멸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탬프를 찍고 오늘 날짜를 적는데, 13이라는 숫자가 어색했다. 며칠 남지 않았으니 힘내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힘이 빠지는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좋은 어른이 되고싶은데, 애처럼 행동하는 내가 미웠다.



어제 새벽 세시가 넘어 잠들었다. 이상하게 잠이 안와 말똥말똥 뜬 눈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래도 용케 아침 일찍 일어났고, 오랜만에 아침도 챙겨먹었다. 그리고선 시부야에서 긴자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라인 재팬이 있다는 시부야 히카에리를 지났다.


긴자선을 타고 곧장 우에노로 향했다. 오늘은 국립서양미술관이 무료 관람인 날이기 때문이다. 관람을 하고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그렇게하면 줄을 서야할 것 같아 밥부터 먹고 움직이기로 했다. 한 달 전에 미술관에 가면서 점심을 먹으려 했던 돈까스집에 갔다. 내가 들어갈 땐 웨이팅이 없었는데, 나올 땐 줄을 서 있었다.


타베로그에 누가 맛있으며 저렴한 집이라 소개해놨길래 궁금했다. 750엔짜리 로스가스 정식을 시켰다.


돈가스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머릿 속에 번개가 치지직. 처음엔 돼지고기가 안 익은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정말이지 좋은 고기로 만든 돈가스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두 입 베어물었을 땐, 도쿄에 와서 맛본 돈가스 중 제일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라면, 바삭한 튀김옷이 아니라는 점. 그런데 밥을 너무 많이 주셔서, 마지막 조각을 먹을 땐 정말 고역이었다. 남길 수도 없고ㅠㅠ


너무 배부른데다 느끼해 어떻게든 움직이고 싶었다. 그래서, 미술관에 가기 전에 우에노 북오프에 들어갔다. 어제 못 산 앨범들을 사고 싶었는데, 있을리가.


미술관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물론 우에노는 평일에도 바글바글하겠지.


무료 관람이 아닌 날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을지는 모르겠다. 건물이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서양미술관.


상설전은 무료관람! 한 가지 의아했던건, 무료 관람임에도 티켓을 끊긴 해야했다.


알파벳을 조합한 로고가 마음에 든다. 이 미술관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놀라웠다. 가와사키 초대 회장이 모은 개인 컬렉션이라니. 관람하면서 알게된 내용 중 더 충격이었던건, 모두 사후에 모은 것만은 아니고, 직접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며 구매한거라니! 그래서 모네나 로댕의 작품이 그렇게 많을 수 있는거구나 참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을 계속 했다.


팜플렛을 봐도 내부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적혀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 ‘혼잡의 상황 등에 의해 촬영을 전면 금지하는 경우’ 에 해당하는 날이었나보다. 전면 사진 촬영이 막혀있었다. 그래도 이 사진만은 꼭 어떻게든 몰래 찍고 싶었다. 브뤼겔 겨울 풍경을 보다니 오늘은 운수가 좋나보다 생각이 들었었다.


미술관 건물은 틀에박힌 구조보단 한결 나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뭔가 통일감은 없지만, 본관과 신관이 꽤 괜찮게 이어져 있었다.


외부엔 로댕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밖에 전시된 것보다, 본관 1층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고 너무 놀랐다. 기존에 봐왔던 로댕의 작품들은 사실 봐도 그저 그랬는데 오늘 본 평범한 인물들의 전신상을 보았을 땐 아 로댕이란 사람 정말 과하지 않은 정도를 교묘하게 지키면서 인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재주가 있구나란 생각이 절로 났다. 이름 모를 그 사람의 몸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서 사진을 찍고싶었지만, 모든 관람을 끝내고 밖에 나와 멀리서 찍을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또 그저 그랬다. 뮤지엄 샵엔 생각하는 사람이나 지옥의 문 조각밖에 없었다.


엽서도 꽤 많이 있었는데, 좋아하는 그림의 엽서는 거의 없었다.


다행히도 브뤼겔의 겨울풍경은 있어 사왔다.


안에서 못찍은 로댕의 한을 밖에선 원없이 찍었다.


빛을 받아 잔근육이 도드라질 땐 정말 아름답단 생각이 든다.


얼른 서둘러 아사쿠사의 갓파도구거리로 갔다. 3시에 쇼켄상을 봐야되는데 늦었다 늦었어. 오른쪽 아래 그릇같은 민무늬 그릇들을 사고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질감이 설거지하기 불편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많은 샵들이 휴가를 떠난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기위해 대강 훑기 시작했다.


계란말이 후라이팬같은 것도 사갈까 싶었지만, 한국에서 사는게 낫겠지?


간자선을 타고, 아오야마잇초메에서 오에도선으로 갈아타기로 했다.


드디어 저 멀리 센다가야 역이 보인다. 예전에 신주쿠교엔 갈 때 지나가기만 했었는데. 택시 뒤로 쇼켄상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나도 10분 일찍 도착했는데, 쇼켄상도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역 옆에 카페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선 센다가야 역 옆에 있는 게이오 대학 병원에 갔다.


바로 이 곳이 사카이 이즈미가 추락한 그 곳이란다.


정말 말도 안되는 높이인데, 저 난간에 걸터앉았다가 균형을 잃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꽃을 들고 가고 싶었는데, 병원에 입원한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고싶진 않았다. 조용히 서성이다 얼른 나왔다.


병원을 보고나니 더이상 도쿄에서 뭘 해야할지 우왕좌왕했다. 분명 뭘 해야지 계획들이 있었는데 정말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작정 지도를 보고 근처 게이오 대학을 구경하기로 했다.


메인 캠퍼스가 아닌 탓인지, 별로 볼 건 없었다.


저 안에 수브니어샵이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고. 그냥 겉만 구경했다.


어쩌다보니 다시 게이오대학병원 뒷편으로 와 있었다. 병실에 입원해 있고, 산책을 하러 돌아다니는 사카이 이즈미의 모습이 상상되어 괜시리 맘이 짠해왔다. 아자부주반에 살다가, 게이오병원에 입원하고, 아오야마장례식장에서 떠난 그녀의 마지막 발자취들이 너무 협소한 세계에 몰려있어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뭘할지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에코다역으로 가보기로 했다. 에코다엔 지하철이 안다녀서 신에코다로 오에다선을 타고 갔다.


에코다역으로 넘어가는 길. 집주인의 취향이 확실해보인다.


가는 길에 북오프에 들어갔다.


헐 포뇨랑 하울의 움직이는 성 아트북은 있는데 붉은돼지는, 붉은돼지는 없다. ㅠㅠ


중국집과 펍이라니. 묘한 어울림.


에코다역 근처는 뭐랄까 생각보다 너무 사람사는 동네여서 놀랐다. 영화속에선 그래보이지 않았는데.


그리고 리모델링 된건지, 에코다 역도 너무 삐까뻔쩍해서 놀랐다.


쉘위댄스에서 주인공이 전철에서 바라보던 댄스교습소 빌딩이다.


어느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플랫폼에 멈춰선 전철에 서있다 나온거겠지.


해가 지기 전에 봐서 그런가, 그 느낌은 나지 않지만 저정도 창문에 쓰인 글이면 눈에 띄겠단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다 아름다운 여성이 창문에 서있었다면 더더욱!


여기까지 온 김에 플랫폼에도 서보고, 세이부 이케부쿠로선을 타고 갈까도 싶었지만 그냥 걸어서 동네 구경을 더하기로 했다.



saddle 형태를 한 주택 입구라니.


공사 중에도 화장실 문제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으니까.


코타케 무카이하라역으로 걸어와 후쿠토신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어디든 가서 구경할까도 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뭐랄까 얼른 집에가서 쉬고 싶었다. 근데 또 막상 집에와서 쉬지도 못했다. 아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