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들

마음이 너무 들뜨거나, 혹은 너무 가라 앉았을 때 찾아보는 영상들이 있다.

옛날 같았으면 너무 많이 돌려보고 돌려봐서 테이프가 닳고 닳았다 할텐데 다행히도 외장하드에 있는터라 아직도 새삥처럼 따끈따끈한 영상들이다.

요즘 일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그 와중에 저 영상들도 다시 부지런히 복습했다. 들떴던건지 우울했던건지는 알 수 없는데 어쨌든간 오랜만에 만난 정든 친구와 신나게 수다떨고 온 기분이라 다시 마음이 붕 떠진 상태다.

나중에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이 글을 보며 ‘음,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난…’ 하고 있을지 ‘아니 내가 그 때 그런 걸 봤단말야? 챙피하게!’ 하고 있을 지는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2010에도 확실히 보고 있었다. ㅋㅋㅋㅋ

  1. 상도 36화 으! 상도는 매화 너무 좋지만, 36화는 메이저 오브 메이저, 정말 사이다 중 사이다다. 홍득주와의 관계, 다녕과의 관계, 정치수와의 관계, 그리고 홍경래와의 관계까지 임상옥이 맺은 모든 관계가 이리도 큰 울림을 준다는 건 정말 대단하단 말 밖엔 할 수 없다.

책으로 읽는 상도도 너무 좋지만, 36회에서 인삼을 불태우고 청국 상인들로부터 ‘량바이!’ 외침을 귀로 직접 듣는 건 아, 인생을 살아가며 현명한 선택이란 저런 거지 하는 위안과 용기를 얻게한다.

디펜스가 끝나고 1, 2월에 시간이 허락하면 집에서 상도를 가져와 다시 찬찬히 읽고싶다. 책은 외장하드와 다르게, 정말이지 닳고 있어 걱정이지만.

  1. 파리의 연인 9화 사실 가장 많이 본 화는 1, 2화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파리를 좋아하지 않는데, 파리의 연인을 볼 때마단 파리로 날아가고싶어 팔다리가 룰루랄라 어찌할 줄을 몰라한다.

파리의 연인을 찬찬히 살펴보면 파리 로케이션은 절반의 성공인데 그래도 참 좋다. 그 느낌을 담아왔다는 것이 너무 신기할 따름이다. 거기다가 박신양과 김정은, 그리고 김서형이 함께라면 으으으!

파리의 연인 9화는 기주가 그랜드 하얏트 호텔 대기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천장 높이 설치된 카메라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시작된다. 열렬히 좋아해 마다않는 그랜드 하얏트가 나오는 것도 좋지만 가장 좋은 장면은 태영이 일하는 세차장에 무대뽀로 들어온 자동차가 한동안 말이 없다, 갑자기 창문이 내려가고 썬글라스를 쓴 채 태영이 아닌 앞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기주가 나오는 장면이다.

태영: 오늘 약혼 하는 날 아니에요? 기주: 맞어

저 맞어 라는 아무 멕아리 없는 대사를 표현하는 박신양의 제스처와 보조개가 으 정말이지~ ㅋㅋㅋ

생각해보면 파리의 연인 중 굳이 이 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굉장히 힘든 시기에 나처럼 도피하고 있는 누군가를 관찰하는 느낌이 들어서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이는 어떻게 도피하나, 그는 도피할 때 어떤 생각을 했으며 도피 후 상황들을 어떻게 정리해나갔나. 뭐 이런 관찰을 통해 내 삶을 다시 돌아보고, 또 깔끔하게 정리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다.

힘이 들 때 도피하는 영화는 없다. 혹자는 드라마가 너무 길다하지만 영화의 호흡은 너무나도 길어 위로 받다 기진맥진 쓰러질 형편이다.

나와 평생을 함께하는 드라마 속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다. 라고 쓰고보니 뭔가 가상 현실 오타쿠같지만, 나는 그들이 정말이지 죽마고우같다.